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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수운 최제우의 검결(劍訣)과 임술년 진주민중항쟁
현암 최정간(매월다암원장, 차문화 연구가)   |   2021-06-13
▲ 현암 최정간(매월다암원장, 차문화 연구가) 

 화창해야할 봄 날씨에도 코로나19의 공포와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이상기후 현상이 나타나기 일쑤라 온화함을 느낄 수 없다. 21세기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은 조화로운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고, 이러한 인류 문명의 흐름을 대자연은 크게 꾸짖고 있다. 우리의 어리석고 오만한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인류 역사의 종말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1860년 수운 최제우(1824-1864)는 인간들의 이기적인 마음을 뜻하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을 비판하고 경주에서 동학(東學)을 창도했다. 기존의 세계를 뜻하는 선천(先天)의 수직적인 문명의 구조를 훗날 맞이할 후천(後天)에서 수평적인 세계로 전환하는 대선언을 하였다. 인간 사이만의 평등이 아닌 만물이 평등한 세계이기에, 신과 인간도 동등한 존엄성을 가질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 또한 동등한 위치로서 경외하는 생명사상에 이르게 되었다. 훗날 이와 같은 사상이 해월에 의해 민중들에게 퍼져나갔고 후천개벽을 꿈꾸는 동학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인류가 맞이한 거대한 질병과 기후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 한번 동학 정신을 상기하게 된다. 최근 한국 철학자 도올 김용옥은 각고의 세월 동안 학술적 연구 결과 수운이 저술한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2권으로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이번 출간은 한국 사상계의 불멸의 업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도올은 동경대전 번역본에서 수운의 진실한 삶이 투영된 사상과 동서고금의 철학사상을 넘나들며 해박한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 진주민중항쟁을 보고 검결(劍訣)을 지은 수운 최제우
수운이 1860년 동학을 창도한 후 본격적으로 동학 포덕에 나선 동기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임술년 진주민중항쟁이었다. 수운은 칼의 노래를 뜻하는 '검결(劍訣)'이란 가사를 짓는다.

 

-혁명군가 칼의 노래-
"때다! 때다! 이 나의 때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절호의 때다!/ 만세에 한 번 날까 말까하는/ 장부로서/ 오 만 년 만에 잡는 때다!/ 용천검 잘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위의 시는 도올의 번역이다. 필자는 1994년 수운의 칼의 노래는 임술년(1862년) 진주민중항쟁을 자신이 직접 목격한 후 지었다는 설을 학계 최초로 제기한 바 있다. 아쉽게도 지금까지 많은 동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수운의 칼의 노래와 임술년 진주민중항쟁과의 관련성에 대해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있다.


수운이 직접 지은 동학가사 중 칼의 노래만큼 혁명적인 느낌은 없다. 위정자들에겐 위험천만한 노래라 하여 항상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갑오년 동학혁명 당시 칼의 노래는 혁명군가로서 이름 없는 민중들에게 불리며 산하의 골짜기에 핀 꽃잎처럼 피었다가 산화되었다. 수운도 칼의 노래 때문에 1864년 3월 10일 대구 장대에서 조선왕조의 탄압으로 순교의 피를 뿌렸다. 칼의 노래에는 동학이 다 풀지 못한 민중들의 한이 서려 있다. 그렇다면 수운은 어떠한 동기에서 이러한 호전적인 가사를 짓게 된 것일까.

 

▷진주성의 함성
1861년 11월 수운 최제우는 경주 관아의 지목을 피해 경주 용담정을 떠나 호남 방면으로 잠행하게 된다. 가는 고을마다 민중들은 돌림병인 괴질과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로 인해 민심은 폭발지경이었다. 12월 전라도 남원읍에 도착하여 10리 밖 교룡산성 안에 있는 선국사의 암자를 빌려 은적암이라 칭하고 수도에 정진하였다. 임술년 당시의 심정을 용담유사 '권학가'에 남기기도 했다.


2월 18일 진주에서 몰락한 양반 세력인 유계춘, 김수만, 이명윤 등에 의해 주도된 임술년 진주민중항쟁이 활화산처럼 폭발한다. 진주와 남원은 그리 멀지 않아서 보부상들을 통해 진주의 민중항쟁 소식은 남원 은적암의 수운에게까지 즉각 당도하게 된다. 당시 서부 경남 민중들에 의한 주체적이고 수평적인 세상을 향한 대변혁 현장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기 위해 즉시 진주성으로 달려갔다. 진주성 밖의 분위기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수운이 그토록 열망하던 '시호(時乎) 시호(時乎)'가 오고 있었던 것이다.


진주민중항쟁을 생생하게 목격한 수운은 대단히 충격을 받았고 이제 민중들에 의한 후천개벽 세상이 도래했다고 믿었다. 은적암에서의 깊은 사색을 통해 후천개벽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고, 전투적인 칼의 노래를 지어 리듬에 맞춰 칼춤을 추는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도피와 은둔생활을 청산하고 경주에 돌아와 동학의 포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894년 동학혁명 당시 하동군 진교면 안심리 금오산과 옥종면 고승당 기슭에서는 동학 혁명군과 일본군 사이에 대혈전이 벌어져 총탄에 이름 모를 수많은 민중들이 쓰러졌다. 13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곳에는 민중들이 못 다 부른 칼의 노래가 메아리 없는 절규로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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