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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조선 전기 문화아이콘 강희안…고향 진주로 초혼하는 사업에 적극 나서자
현암 최정간(매월다암원장, 차문화 연구가)   |   2021-01-13
▲ 현암 최정간(매월다암원장, 차문화 연구가) 

조선 전기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시·서·화 삼절로 불린 인재(仁齋) 강희안(1417-1464). 그는 진주가 낳은 위대한 멀티형의 문화인이며 영원한 노스탤지어(nostalgia) 시인이자 천재 화가다. 오늘날 진주인들 중에 안타깝게도 강희안의 고향이 진주란 것을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진주에서 태어난 것에 유난히 자긍심을 가졌다. 그의 또 다른 호를 진주의 옛 지명에서 따와 '청천자(菁川子)'라 짓기도 했다. 강희안의 초기 회화 작품과 시에서 고향 진주와 인근의 두류산(지리산) 청학동과 생가 초당, 그리고 남강변의 대밭에 대한 망향의 그리움을 붓끝으로 애절하게 묘사했다.


필자는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에 관한 새로운 해석」이란 논문을 2013년 진주교육대학교 경남권 문화 23호에 발표한 바 있다.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의 배경이 된 장소를 고향인 진주 촉석루 아래 남강이 보이는 절벽임을 밝히게 되었다. 고사관수도의 제작 배경을 심도 있게 연구해보면, 강희안 자신이 계유정난을 통해 사랑하는 문우들을 피비린내 나는 형장의 이슬로 다 떠나보낸 후 그 마음의 내상을 홀로 살아남은 삶의 모습으로 형상화시킨 자화상임을 알 수 있다.


그는 1471년(조선 태종 17년) 경남 진주 서북쪽 남강 상류에 위치한 대숲 아랫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모부가 바로 조선 최고의 명군 세종대왕이다. 동생은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으로 농학자이자 형님 강희안과 함께 조선 전기 대문호였다.


강희안의 집안은 진주 강씨 명문으로 할아버지는 고려 말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강회백(姜淮伯, 1357-1402)이며 아버지는 조선 전기 문신인 강석덕(姜碩德, 1395-1459)다. 강회백, 강석덕, 강희안, 강희맹 3대 모두는 고향 진주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강희맹이 남긴 문집 '진산세고(晉山世稿)'가 이들의 문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진산이란 강희맹의 또 다른 호로서 진주를 뜻하는 의미다. 강희안 집안의 3대는 벼슬살이 때문에 타향에서 늘 고향 진주로 돌아가길 바랬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상황은 이들 귀향을 막았고, 고향을 하염없이 그리워했다. 다음은 강희안이 남긴 '억진양(憶晉陽)'이란 시다.

 

날로 아득한 산 바라보며 진양을 생각하니(日望遙岑憶晉陽·일망요잠억진양)/ 젊은 얼굴에 구레나룻 물결처럼 희어지네(軟紅能使鬂滄浪·연홍능사빈창랑)/ 이른 매화 남쪽 산골 한겨울에도 따뜻하네(早梅南間冬猶暖·조매남간동유난)/ 북쪽 창엔 긴 대나무 있으니 여름도 시원하네(脩竹北窓夏亦凉·수죽북창하역량)/ 웃음을 참자하니 옛날의 버릇 젊을 때의 흥미가(堪笑因循少興味·감소인순소흥미)/ 늙어서 내 고향 돌아감만 같지 못하네(不如歸去老吾鄕·불여귀거노오향)/ 세상에서 나를 흥기할 사람은 상이니(起予世上唯商也·기여세상유상야)/ 늘 맑은 시를 지어 초당에 보냈었지(每作淸詩寄草堂·매작청시기초당)

 

이 시는 영혼에서 울리는 고향 진주에 대한 향수가 담겨있다. 강희안은 15세기 진주가 낳은 문화의 아이콘이자 보석이다. 그는 독창적인 화법과 뛰어난 시 정신으로 동아시아 문화사에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를 낳은 진주만이 강희안의 위대한 업적을 잊은 것 같다. 진주는 고대로부터 충의와 역사, 문화 예술의 고장이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진주의 깨어있는 문화 의식을 가진 시민들과 관계 당국이 합심하여 일생을 진주인이란 자긍심으로 살다간 강희안을 초혼하는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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