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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잊을 수 없는 진주 정신 뿌리 충절공 하공진 장군
현암 최정간(매월다암원장, 차문화 연구가)   |   2020-09-09
▲ 현암 최정간(매월다암원장, 차문화 연구가) 

진주 정신이란 누가 뭐래도 충절이다. 국내 많은 사람들은 16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혈전이었던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대첩을 진주의 상징처럼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진주 정신의 뿌리를 찾아 나서다 보면 그보다 훨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1세기 고려 현종 때에 진주 출신 하공진 장군에 이른다. 10세기 후반과 11세기 초기 동아시아 국제정치 질서는 초원 제국의 대정복자 요나라(거란)의 성종(야율문수노)이 주도했다. 거란의 성종은 동아시아 패권의 한 축이었던 고려를 정복하고자 전쟁을 일으켰고 서희의 담판으로 유명한 1차 거란 전쟁에 이어 2차 전쟁을 일으킨다. 이때 역전의 용사 형부낭중 양규, 구국의 영웅 명재상 강감찬과 함께 고려의 기상과 진주의 충절 정신으로 대활약한 이가 있으니 바로 그가 진주 출신 충절공 하공진 장군이다. 충절공은 단순히 현대인들에게 진주 하씨의 시조로만 알려져 있지만 시대적 영웅으로서 재조명 받을 필요가 있다.


고려의 정사 '고려사'와 거란의 역사서인 '요사'에 의하면 거란이 쳐들어오자 고려 왕실은 항복을 고민하다가 강감찬의 의견으로 전략적 철수를 감행한다. 당시 하공진 장군은 군사 20여 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난 중이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거란군의 철수 교섭을 자청했다. 그는 현종의 사절로 요 성종을 만나 현종의 친정과 더불어 스스로 볼모가 되는 조건으로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돌아가는 거란군을 양규가 군사를 이끌고 공격했고 거란군은 수많은 피해를 입고 돌아갔다.


하공진 장군은 거란에 볼모로 잡혀가게 됐다. 수도 연경에서 철저한 감시 속에 여러 번 고려로 탈출을 감행하다가 이 사실이 탄로나 성종에 의해 모진 고문과 회유를 받게 된다. 하지만 나라에 대한 굳은 충정으로 완강히 거절했고 이를 비웃듯이 모욕스러운 언행으로 성종을 격분시켰다, 분노한 성종은 참형을 내려 끝내 하공진 장군은 타국에서 순국하게 됐다.


서기 1012년 고려 현종은 충절공이 요나라 성종의 회유를 끝내 거부하다 적국에서 순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후손에게 상을 내려 그의 충절을 기리게 했다. 이러한 하공진 장군의 구국을 위한 희생이 있었기에 고려는 다시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으며 거란과의 3차 전쟁에서 귀주대첩을 끝으로 승리하게 됐다. 거란과의 전쟁이 당시 동아시아 패권 싸움에서 매우 귀중한 고려의 승리였던 만큼 반드시 하공진 장군의 숭고한 희생과 충절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진주성내 하공진 장군을 모신 사당인 '경절사'가 이전된다는 소식을 듣고 필자는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분노와 비통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역사와 충절의 도시를 지향하는 진주시는 과연 11세기 동아시아 국제적 영웅 하공진 장군의 정신을 짓밟으려 하는 것인가. '경절사'는 역사와 전통에 따라 반드시 현 위치에 존재해야 하며 오히려 국가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현대인들과 후세에 충절의 정신을 전할 진주의 랜드 마크로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11세기 동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연극사에 가장 빛나는 금자탑인 '하공진 놀이'를 문화콘텐츠화 하기 위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영상물로 제작해 국내외 홍보를 통해 한류관광의 중심지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한편 현암 최정간 원장의 저서로는 '한차 문명의 동전', 차의 세계, 2013, '해월 최시형가의 사람들', 웅진출판주식회사, 199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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