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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덕의 고금담리(古今談理) (79) : “다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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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덕 경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2019-02-12

▲ 경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엊그제 설날 떡국을 먹으며 잊지 못할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어려서 떡국 속의 두부를 싫어했다. 아무런 맛도 없는 그 심심한 식감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엄마는 늘 떡국을 뜰 때 내 그릇에는 두부를 뜨지 않으셨다. 그러던 중 좀 난처한 일이 생겼다. 외갓집에 세배를 갔는데 외할머니가 큰 놋대접에 두부가 가득한 떡국을 한 그릇 떠 주셨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어린 나이에 수줍어 감히 말은 못하고 꾸역꾸역 먹을 수밖에 없었다. 와중에 잔꾀를 하나 생각해 냈다. 뒷맛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먹기 싫은 두부를 먼저 다 먹어버리고 맛난 떡으로 끝마무리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다름 아닌 '고진감래(苦盡甘來)'와 비슷한 이치였다.


 그런데 하늘이 두 번째로 무너졌다. 두부를 허겁지겁 다 먹어갈 즈음, 가만히 보고 계시던 외할머니가 "우리 손주가 두부를 참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그래 많이 먹어라." 그러면서 먹어버린 양보다 더 많은 두부를 듬뿍 떠 주셨다. 지금까지 기억되는 대목은 여기까지다. 그 뒤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고진감래'. 참 좋은 말이다. 희망적인 메시지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유치하고 견강부회하긴 하지만, 어릴 적에 겪은 이 떡국사건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럼에도 나는 늘 '고진감래'의 이치를 좋아했다. 책이나 선생님의 이야기 속에서 그런 사례들을 접할 때면 언제나 감정이입을 통해 대리만족을 할 수가 있었고, 그런 정신을 노래한 시나 시조가 있으면 특히 좋아했다. 그중에 하나가 푸시킨의 '삶'이란 시였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이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프고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은 순간이고 지나간 것은 항상 그리워지느니라." 어린 나이에 겪은 떡국사건은 '고진감래'의 세상 이치를 반박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되어 주었지만, 환갑을 넘긴 오늘 가만히 지난날들을 돌아볼 때면, '모든 건 순간이고, 지나간 건 항상 그리워진다.'는 푸시킨의 말이 어찌 이렇게도 절절하게 다가오는지….


 실제로 삶이 그런 것 같다. 어려움 없이 사는 인생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대부분이 크고 작은 시련을 겪으며 살아가고, 때로는 감내하기 힘든 역경에 죽을 각오로 전사(戰士)처럼 살아가기도 한다. 큰일을 당했다 싶을 땐 누구나 '억장(億丈)'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가고, 세월이 지난 후면 그 고통은 그저 아련한 추억이 되고 만다. 아니, 때로는 그리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세월이 약이라 한 것이리라. 분명, 모든 건 순간이다. 그리고 다 지나간다. 그래서 힘들 때도, 세상의 끝이다 싶을 때도, 기도처럼 자기 최면을 걸 필요가 있다. 김윤아 노래처럼…. "괴로운 순간들이면 나도 모르게 기도처럼 읊조리며 나를 다독인다. 다 지나간다, 다 잊혀진다. 상처는 아물어 언젠가는 꽃으로 피어난다. 다 지나간다, 모두 지워진다."


 삶의 현장에는 모순덩어리가 너무 많다. 그 모순 속에서도 우리는 끝까지 '살아내고' 또 행복했으면 좋겠다. 방법은 스스로가 행복할 수 있는 지혜를 애써 찾아 실천해 가는 일이다. 장수하신 어느 어르신께 장수의 비결을 물었단다. 살면서 미운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어찌 큰 스트레스 안 받고 행복하게 살아올 수 있었냐고. 대답은 간단했단다. "그냥 냅뒀어. 그랬더니 다 알아서 죽던데 뭘." 삶의 철학이 묻어있는 대답이다. 그러나 삶의 태도나 방법에 대해서는 시시비비가 엇갈릴 수 있는 대답이다. 왜냐면 살다보면 그냥 '냅둬서는 안 될' 일이 많기 때문이다. 내 뜻대로 하고 싶은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냅둬서는 안 될 일에, 내 뜻대로 하고 싶은 일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목숨을 걸어도 내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자기 위로다. 화병으로 쓰러지기보다는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해 주는 자기 격려의 말이다. "다 지나간다"는….

기사입력 : 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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